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주체의 해체 ==== 니체의 [[데카르트]] 객관론 비판 부분이다. 데카르트는 20세기 서양철학의 병기창이라 할 만큼 아주 중요하다. 근대에 이어져 온 서양철학의 객관론 vs 주관론 문제에서 근대 유럽의 객관론 시조가 [[데카르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코기토]], 나라는 존재가 생각한다는 것 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라고 믿었다. >1. 나는 생각한다, >2. 고로 나는 존재한다. >ego cogito, ergo sum 니체는 이것을 2개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첫번째 비판은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에 관한 것인데, 그는 '생각'은 내가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며, 그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나는 단수가 아니다|단수가 아니다]]는 반박을 한다. 그는 [[정동 #철학 용어|정동]]이란 개념을 논하는데, 맥락상 [[스피노자]]의 개념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몸은 자기보존을 지향하고, 이로 말미암아 정동(번역에 따라 정서)을 갖는다. 정동은 평소에는 구체성이 없는 기분에 머무는데 정동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예쁜 여성을 봄) 구체적인 욕망(성욕, 애욕)으로 의식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은 대부분이 내가 의식해서가 아니라 외부자극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시각은 현대 뇌과학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사상은 '그 사상'이 원할 때 오는 것이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선악의 저편』 그러한 무작위로 떠오른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의 정신이 '단일체'로 보이는지에 관해서 니체는 [[기계론]], [[벡터]]스러운 설명을 한다. 물체에 관성이 있듯이, 정신의 [[정동 #철학 용어|정동]]이 그런 운동상태 같은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와 [[코나투스]]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정동을 극복하는 의지는 결국 다른 또 하나 또는 몇 개의 다른 정동의 의지일 뿐이다. >『선악의 저편』, 제4장 117 니체는 이러한 정신이 수많은 정동이 다툰 끝에 하나의 방향(벡터값)이 정해지는 것으로 본다. [[뉴턴역학]]에서 수많은 힘이 충돌했음에도 최종 현상은 선형 운동이듯이, 정신도 그 안에는 무수한 정동의 의지가 충돌했음에도 나타나는 것은 단 1개의 정동 뿐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정신이 단일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주체의 '단일성' 또한 착각에서 나온 편견에 불과하다. 그래서 니체는 정신은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1. 초콜릿을 보고 식욕을 느낀다. >2. 벨트가 뱃살에 가하는 압력이 다이어트의 필요를 일으킨다. >3. 저혈당으로 인한 현기증이 마라톤을 할 때의 어지러움을 연상케 한다. > >결론: 세 가지 생각이 충돌한 결과, 초콜릿을 먹으며 다이어트(마라톤)을 결심한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생각들의 충돌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과 같다. 단지 나라는 단 하나의 몸 안에서 벌어질 뿐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 니체의 주장은 현대의 [[분리뇌]]와 [[외계인 손 증후군]] 관찰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 게다가 이 관점은 20세기 초반 [[정신분석]]의 기반을 닦아주었기에 철학사적 의미도 상당하다.] 니체의 두 번째 주장은 [[분석철학]]에서 좋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우선 그가 시작하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는 단일 명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생각한다. >1.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2. '생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3. 생각을 하는 상태와 비교 가능한 생각을 안 하는 '상태'가 존재한다. 는 3가지 숨겨진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을 우리가 인식 못하는 이유를 니체는 언어의 문법에서 찾는다. 니체는 독일어를 비롯한 유럽 주류 언어들이 문법상 주어가 필수라는 점을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더 구체화해서, 'be동사의 뜻은 있다/이다'임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무엇이든지 '단어'가 있으면 그것이 정말로 세상에 실존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주어 중심의 문법 때문에 유럽인들이 공통된 편견을 가졌고, 그래서 철학을 왜곡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공통된 문법 철학에 힘입어 철학 체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세계 해석의 어떤 다른 가능성을 향한 길이 막히는 것 >『선악의 저편』 반면에 [[우랄 알타이 제어]]에 속하는 철학자들(한국어도 포함된다)는 그들의 언어가 주어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 주장은 한국 철학자들이 엄청 마음에 들어하며 자주 인용된다.] 이러한 니체의 언어에 의해 사고가 한계지어질 수 있다는 관점은 20세기 철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단일성을 지닌 주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편견을 유럽인들이 왜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니체는 이 또한 몸철학의 관점에서 답변한다. 자기보존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나의 몸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유용한 편견'이라는 것이다. 확실한 토대가 있어야 그것을 지반으로 집을 짓듯이 이 세상을 이해([[모델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단일 객체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에서 이 몸을 보존하는 전략을 짜내는데는 훨씬 간편하기는 할 것이다. 니체는 주체의 단일성이란 인간의 편견이 서양의 종교와 과학에도 깊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주체의 단일성 + >주체의 불변성 + >주체의 영원성 >= 기독교의 [[영혼]], 자연철학의 [[원자설]] 이란 것이다. '확실성'을 위해서 주체의 단일성, 불변성, 영원성이 필요하고 이를 기반으로 상상력을 종교적(정신)으로 전개하면 기독교의 영혼이 되고, 자연철학(물질)으로 전개하면 [[원자설]]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영혼은 곧 정신의 원자론이고, 원자는 곧 물질의 영혼론이다. 모두 우리가 인간이란 동물이기에 가진 '인간적인' 편견이란 것이다. '원자'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하다는 발상은 소위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논쟁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 vs [[닐스 보어]]를 비롯한 신세대 물리학자의 논쟁 또는 [[불확정성 원리]]을 반세기 가까이 앞선 것이다. 실제로 신세대 독일 물리학자들은 당대에 대중화된 [[실증주의]] 철학에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니체 또한 실증주의 계열에 한 발 걸쳐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우연은 아닐 것이다. [* 이렇게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례는 종종 있다. 칸트의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과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에서 동시성 이론을 전개했다. 그것을 아인슈타인이 그대로 이어받아 상대성 이론을 발명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그와는 별개로 상대성 이론을 자기 철학에서 전개했다. 이는 과학과 철학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이고 상상물이라는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다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